국내산행기
정기토요산행기
[1558회] 가야산 산행기
2013.11.06 Views 23 부길만
가야산 산행기 -부길만-
일시 : 2013년 11월 2일
장소 : 가야산
참가 : 박찬익, 홍사룡, 강주연, 김유영, 김호중, 박경미, 부길만, 이정수, 채호기
오늘 토요산행은 가야산이다. 새벽 6시 20분 합정역, 6시 40분 강동역 출발 시간에 맞추어 다들 모여 낯이 익은 서명필 부장 버스를 타고 경남 합천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경치 좋기로 유명한 문경 휴게소에서 된장찌개, 순두부, 돈가스 등을 시켜 먹고 다시 버스에 올랐다. 시간은 9시 20분. 박경미 님은 아침 식사 시간이 짧았던 탓에 급히 먹다 보니 체하여 컨디션이 안 좋다. 그래도 산행 의지는 단단하다.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안내를 맡은 홍사룡 사장님은 이번 산행 코스를 프린트해 와서 대원들에게 나누어 주며 6시간 걸릴 것이라고 일러준다. 중간쯤 가는데, 박총무님이 참석 못한 오상환 회장님과 전화하는 중에 낭보가 터졌다. “오회장님, 어제 골프 홀인원!” 그 덕에 박총무님은 순발력 있게 오늘 산행 참가자 전원 저녁 한 턱 얻어먹기로 약속을 받아냈다. 아침 식사는 박총무님이 쏘았고, 산에서 먹을 점심은 이미 김밥을 준비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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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는 별로 막히지 않아 11시에 목적지인 가야산 국립공원 주차장에 도착했다. 오늘의 코스는 백운동에서 출발하여 상왕봉 정상을 거쳐 해인사로 내려오는 것이다.
11시 15분 백운동 탐방지원센터에서 가야산 정상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주소는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산 1-1” 이다. 이처럼 ‘가야’라는 이름이 지금은 시골 ‘면’의 명칭에 속할 정도로 왜소해졌지만, 원래 가야는 고유의 신화를 가졌으며 찬란한 철기문명을 이룩했던 나라 이름이었다. 그 신화 속의 주인공 후손들은 지금도 한국인의 성씨 중에 가장 많은 인구를 갖고 있다. 바로 ‘김수로왕의 신화’이다. 그 내용을 상기해본다.
김해 지역의 아홉 족장들이 구지봉에 올라가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안 그러면 구워서 먹으리.” 하는 구지가(龜旨歌)를 부르고 기뻐하며 춤을 추자, 하늘에서 붉은 보자기에 싼 황금상자가 내려왔다. 여기에 담겨 있던 6개의 알에서 어린 아이가 나왔는데, 각기 흩어져 여섯 가야의 시조가 되었다. 김수로왕은 이들 중에 가장 먼저 태어났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바로 금관가야의 시조이다.
이러한 건국신화의 중심 무대가 되는 가야산 산행은 초장부터 가파른 길의 연속이라 힘들었다. 쌀쌀할 줄 알고 옷을 두툼하게 입었더니 얼마 안 가 땀이 난다. 여름 산행이나 다름없다. 그래도 베테랑 채호기 교수님은 저만치 유연하게 앞서 가고 있다. 30분 정도 올라가니 특이한 형상의 바위들이 나오고 가을 단풍이 제철을 만나 아름답다.
약간 위험해 보이는 바위에 올라 사진 촬영하고 다시 서성재를 향해 나아갔다. 1시간쯤 올라가니 힘들고 배도 고픈데, 마침 십여 명이 앉기 좋게 생긴 둥그렇고 넓은 바위가 보인다. “잘 됐다” 하고 김밥을 함께 먹었다. 시간은 12시 45분. 밥을 먹고 김유영님이 준비해온 과일을 나누어 주는데, 한 개가 남는다. “어! 한 분이 빠졌다. 이정수 상무님이 안 계시네.” 책임감이 강한 박총무님이 점심도 먹다 말고 찾아 나섰다. 냅다 뛰어간다. 그 뒤를 걸음이 빠른 강주연님이 달려가고, 다른 대원들도 일어선다. 나도 숨가쁘게 따라갔다. 한참을 가도 이상무님은 보이지 않고, 전화를 해도 산속이라 통화가 안된다. 내 휴대폰에 이상무님과 전화 걸고 받은 기록은 뜨는데, 실제는 불통이다. 간신히 연락이 되어 서성재에 계시라고 해 놓고 다시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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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을 더 가서야 서성재 넒은 공터에서 혼자 외롭게 김밥을 드시고 계신 이상무님을 만났다. 이상무님은 일행들이 앞에 간 줄 알고 서둘러 달려 갔는데 아무도 안 보여 서성재까지 갔다는 것이다. 알고 보니 서성재 이곳이 점심 먹기 딱 좋은 휴식 장소다. 시간은 오후 2시. 잠시 있으니, 다른 대원들도 하나씩 모여든다. 모두들 반갑게 인사하니 마치 소식없이 오랫동안 떨어져 있다 온 친지를 만난 듯하다.
아, 참 서성재 가기 전에 지나온 전설의 바위 ‘상아덤’ 이야기를 놓칠 번했다. 안내판의 설명이 낭만적이다.
상아덤은 달에 사는 미인의 이름인 ‘상아’와 바위를 지칭하는 ‘덤’이 합쳐진 단어로 가야산 여신 정견모주와 하늘 신 이비가지가 노닐던 전설을 담고 있다. 말하자면 정견모주와 이비가지가 이곳에서 부부의 인연을 맺고 두 아들을 낳았다. 형은 대가야(현재 고령)의 첫 번째 임금이 되고 동생은 금관가야(현재 김해)의 첫 임금인 수로왕이 되었다고 하는 전설이다.
앞의 김수로왕 신화는 일연의 삼국유사에 실린 것이고, 상아덤의 전설은 최치원이 저술한 것인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다고 한다. 내용이 조금 달라진 것에 대하여 역사학자들은 가야 역사가 중간에 어떤 중대한 변동이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우리 민족의 시원에 대한 설명은 김수로왕 신화가 더 경청할 만하다. 김수로왕 신화는 오늘날도 별신굿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하며 한국인의 신바람의 원형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라고 풀이하는 학자도 있다.
이제 다시 다 모였고 점심도 잘 먹었으니, 서성재에서 상왕봉 정상을 향하여 힘차게 출발이다. 가는 길은 높고 험한 바위들이 많아 절경을 이루고 있어 구경하기는 좋았지만, 산행은 쉽지 않았다. 그래도 철 계단, 나무 계단을 곳곳에 만들어 놓아 많은 도움이 되었다.
보통 출판인산악회 토요산행은 일반인들이 잘 가지 않는 길을 개척하여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았는데, 이번 토요산행길은 등산객, 단풍 구경 나온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하긴 서울에서 내려오는 길에도 차량이 평소보다 훨씬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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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재에서 한 시간 쯤 올라가니 상왕봉 조금 못 미쳐서 칠불동이 나온다.일곱 불상 모양의 커다란 바위가 있는 곳이다. 해발 1433미터. 가야산 정상인 우두봉이 1430미터이니 단순 높이로는 가장 높다. 이 바위에서 바라보는 전망이 정말 일품이다. 등산의 피로가 깨끗이 사라진다. 여기에서 정상은 200미터 남았다고 표지판이 알려준다. 그런데, 정상 가는 길은 오르막이 아니고 내리막이다. 내려가는 도중에 안내판을 따라 잠시 옆길로 들어서면 여래입상이 보인다. 옛날 모습이 많이 파손되어 복원한 것인데, 보물 264호 문화재이다. 사람들이 치성 드린 흔적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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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조금 더 내려가다 다시 올라가는데, 정상 직전에 우람한 바위들이 길 양쪽에 수호대 마냥 버티고 있다. 우두봉 정상에 도착하니 3시 30분이다. 이제 해인사로 내려갈 일만 남았다. 해인사가 가까워질수록 단풍이 정말 아름답게 물들어 있다. 단풍 색상을 세어 보니 10가지가 넘는다. 이제 대원들도 여유가 생겨 단풍나무 숲을 즐기고 이런 저런 화제들을 꺼내 담소하며 내려온다. 교양 지식이 많고 생활 지혜가 풍부한 김호중님의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유익하다.
가야산의 정기에 취하고 단풍의 아름다움에 취하고 대원들의 담소에 취하다 보니 어느 새 해인사에 도착했다. 시간은 5시 40분. 초반에 체해서 고생했던 박경미님도 말짱하게 회복하고 원기왕성이다.
시간이 너무 늦어 팔만대장경 축제나 해인사 관람은 어려워졌다. 그래도 해인사에 관하여 속속들이 알고 계신 홍사룡 사장님이 안내하여 해인사를 대충 둘러보고 팔만대장경을 보관해둔 ‘대장경판전’ 입구까지 갔다. 늦은 시간이라 문이 닫혀 있어 아쉽게도 관람을 못하고 내려왔다. 해인사 입구로 내려오니 커다란 바위 위에 새겨진 글씨가 보였다.
“세계문화유산
해인사 고려대장경 판전”
여기에서 ‘세계문화유산’이라 함은 유네스코에서 1995년 팔만대장경과 그 경판을 봉안한 고려대장경 판전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것을 말한다. 오가는 버스 안에서도 팔만대장경에 관한 대화가 나왔다. 박총무님은 이번 주 월요일 연변대학교에 갔을 때 국문과 교수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한다.
“고려시대에 팔만대장경은 현대로 말하면 핵무기요.”
이 말에 대원들이 어리둥절. 위의 말이 어폐가 있고 엉뚱하지만, 팔만대장경을 전공한 조선족 국문학자로서는 나름의 비유라는 생각도 가능하겠다 싶었다. 내가 몇 마디 보탰다.
팔만대장경 조성은 거란과 몽골 군대가 침입했을 때이다. 전쟁의 와중에 고려인들은 왜 활과 칼 대신에 대장경을 새겼을까? 이는 당시 팔만대장경 조성을 통하여 국민총화를 이끌기 위함이었다. 무신정권, 왕실, 귀족, 일반 백성들 간의 갈등을 단번에 풀고 거국적 단결을 이루어낸 것이다. 또한, 대장경을 소유한 나라는 문화대국이라는 국제적 인식이 있었다. 말하자면 문화대국임을 과시해서 외적이 넘보지 못하게 하자는 의도였다. 이러한 단결과 대국 의식은 세계 최강 몽골 군대와 크고 작은 전투를 벌이며 40년 넘게 항쟁하게 한 원동력이었다. 또한, 막강했던 몽골의 군대는 오늘날 흔적조차 찾을 수 없지만, 고려의 팔만대장경은 전세계인의 문화 유산으로 지금도 살아 있다.
해인사에서 나와 우리 버스를 타고 한 시간 가까이 달려 성주 고속도로 들어가기 직전에 있는 쇠고기 전문점을 찾아갔다. 시간은 7시가 조금 지났다. 오상환 회장님 덕분에 등심고기 등 비싼 고기를 실컷 먹으며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일어서니 시계 바늘은 9시를 향하고 있었다. 이제 서울 도착하면 하루가 지나 내일이 되겠지. 그러고 보니 즐거운 이틀이었다.
